해마다 명절이 되면 충남 서산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들 집 수십 채 앞에는 맑은 천일염 30kg 포대가 놓여 있곤 했다. 13년째다. 아무도 누군지 몰랐다.
그러던 지난해에 범인(?)이 잡혔다.
"나 혼자 여러 해 동안 소금을 나르다 보니 힘이 들어서.."
읍사무소에 맡기겠다고 소금을 트럭에 싣고 그가 자수(?)했다.
강경환(50).
충남 서산 대산읍 영탑리에서 부성염전이라는 소금밭을 짓는 소금장수다. 그런데 보니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이 아닌가. 손 없이 염전을? 또 서류를 살펴보니 그는 7년 전까지 그 자신이 기초생활수급자였던 빈곤한 사람이 아닌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내가 남을 돕는다?
소금장수 강경환은 사건이 발생한 연월일시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1972년 12월 24일 오전 9시 40분. 1959년생인 강경환이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은 6학년 그해 나이는 13세였다. 서산 벌말에 살던 강경환은 해변에서 '안티푸라민' 통을 닮은 깡통을 발견했다. 나비처럼 생긴 철사가 있길래 그걸 떼내 가지고 놀겠다는 생각에 돌로 깡통을 두드렸다. 순간 앞이 번쩍하더니 참혹한 현실이 펼쳐졌다. 안티푸라민이 아니라 전쟁 때 묻어놓은 대인지뢰, 속칭 발목지뢰였다.
폭발음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달려와 경환을 업고 병원으로 갔다. 사흘 뒤 깨어나 보니 손목 아래 두 손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 되었다. 노래 잘해서 가수가 꿈이었던 소년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된 것은..
피를 너무 흘려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살아났다. 하지만 '남 보기 부끄러워서' 중학교는 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 뒤로 3년 동안 경환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어머니가 밥 먹여주고 소변 뉘어주며 살았다고 했다. 소년은 고등학교 갈 나이가 되도록 그리 살았다. 인생, 포기했다.
열일곱살에 주막에 출근했고 술로 살았다. 어느날 유인물이 하나 왔길래 무심코 버렸다가 아침에 다시 살펴보니 팔 둘이랑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었다. 가서 들었다. 저사람은 나보다 더한데 떳떳하게 산다. 그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나도 당신처럼 잘 살 수 있나?"라고.. 답장이 왔다. "너도 나처럼 잘 살 수 있다."라고..
아주아주 훗날이 된 지금 강경환은 이렇게 말한다.
"손이 있었다면 그 손으로 나쁜 짓을 하고 살았을 거 같다. 손이 없는 대신 사랑을 알게 되고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었으며 새롭게 살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강경환은 훌륭하게 그 방법을 찾아냈다. 술을 끊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삽질을 익히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하며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다. 지독히 가난한 집이었다.
1994년 아버지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너 염전 할 수 있겠냐?"
이미 1987년 교회에서 사랑을 만나 결혼한 가장이었다. 하겠다고 했다. 피눈물 나는 삶이 시작됐다. 농사 짓는 삽보다 훨씬 무겁고 큰 삽을 '손 몽둥이'로 놀리는 방법을 익히면서 해야했다. 그는 그 스스로 손몽둥이라 말한다.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 밤 9시까지 염전에 물을 대고 새벽까지 소금을 펐다. 하루 2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지만 보람으로 일을 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인내라는 것이 그리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1996년 그 와중에 그의 머리 속에 남을 돕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손을 잃은 대신에 얻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소금 한 포대가 1만원 가량하니 여기서 1000원을 떼어 모았다. 그걸로 소금을 당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었다.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올해까지 14년째다. 한달 월급 받고선 고된 일 마다하고 도망가 버리는 직원들 대신에 부부가 직접 염전을 지으며 실천하고 있는 일이다. 아산의 한 복지단체를 통해 소록도에 김장용 소금을 30포대씩 보내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강경환 그는 말했다.
"조금만 마음을 가지면 되는 겁니다. 소금 한 포대 팔아서 1000원 떼면 5000포대면 500만원이잖아요. 하나를 주면 그게 두 개가 되어 돌아오고 그 두개를 나누면 그게 네 개가 되어서 또 나눠져요. 연결과 연결, 그게 사는 원리지요."
그 나눔과 연결의 원리에 충실한 결과 2001년 그는 기초생활수급자 꼬리표를 뗏다. 작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시청으로 가서 자발적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포기했다. 수급자 수당 30만원을 버렸다. 장애인 수당도 포기했다.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주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어렵다. 염전도 남의 염전을 소작하고 있고, 여고생인 둘째딸 학비도 버겁다. 손을 내밀라고,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을 내밀라고. 작년에는 '밀알'이라는 자선단체를 만들었다. 혼자서 하기에는 버거운 일. 그래서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불우한 사람들을 더 도우려고 그랬다.
"한 30억원 정도 모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마음놓고 남 도울 수 있잖아요. 지금은 형편이 이래서 돕고 싶어도 어렵고.. 오늘도 부부가 소금밭에 나가서 소금을 거두는데 손 없는 남편이 능숙하고 진지한 몸짓으로 소금을 모으면 아내는 얌전하게 삽으로 밀대에 소금을 담고 남편이 그 밀대를 '손몽둥이'로 밀어 소금창고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 모습, 장엄이란 단어로 표현하기 부족한 소금장수의 뒷모습이었다.
그러던 지난해에 범인(?)이 잡혔다.
"나 혼자 여러 해 동안 소금을 나르다 보니 힘이 들어서.."
읍사무소에 맡기겠다고 소금을 트럭에 싣고 그가 자수(?)했다.
강경환(50).
충남 서산 대산읍 영탑리에서 부성염전이라는 소금밭을 짓는 소금장수다. 그런데 보니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이 아닌가. 손 없이 염전을? 또 서류를 살펴보니 그는 7년 전까지 그 자신이 기초생활수급자였던 빈곤한 사람이 아닌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내가 남을 돕는다?
소금장수 강경환은 사건이 발생한 연월일시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1972년 12월 24일 오전 9시 40분. 1959년생인 강경환이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은 6학년 그해 나이는 13세였다. 서산 벌말에 살던 강경환은 해변에서 '안티푸라민' 통을 닮은 깡통을 발견했다. 나비처럼 생긴 철사가 있길래 그걸 떼내 가지고 놀겠다는 생각에 돌로 깡통을 두드렸다. 순간 앞이 번쩍하더니 참혹한 현실이 펼쳐졌다. 안티푸라민이 아니라 전쟁 때 묻어놓은 대인지뢰, 속칭 발목지뢰였다.
폭발음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달려와 경환을 업고 병원으로 갔다. 사흘 뒤 깨어나 보니 손목 아래 두 손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 되었다. 노래 잘해서 가수가 꿈이었던 소년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된 것은..
피를 너무 흘려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살아났다. 하지만 '남 보기 부끄러워서' 중학교는 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 뒤로 3년 동안 경환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어머니가 밥 먹여주고 소변 뉘어주며 살았다고 했다. 소년은 고등학교 갈 나이가 되도록 그리 살았다. 인생, 포기했다.
열일곱살에 주막에 출근했고 술로 살았다. 어느날 유인물이 하나 왔길래 무심코 버렸다가 아침에 다시 살펴보니 팔 둘이랑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었다. 가서 들었다. 저사람은 나보다 더한데 떳떳하게 산다. 그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나도 당신처럼 잘 살 수 있나?"라고.. 답장이 왔다. "너도 나처럼 잘 살 수 있다."라고..
아주아주 훗날이 된 지금 강경환은 이렇게 말한다.
"손이 있었다면 그 손으로 나쁜 짓을 하고 살았을 거 같다. 손이 없는 대신 사랑을 알게 되고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었으며 새롭게 살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강경환은 훌륭하게 그 방법을 찾아냈다. 술을 끊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삽질을 익히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하며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다. 지독히 가난한 집이었다.
1994년 아버지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너 염전 할 수 있겠냐?"
이미 1987년 교회에서 사랑을 만나 결혼한 가장이었다. 하겠다고 했다. 피눈물 나는 삶이 시작됐다. 농사 짓는 삽보다 훨씬 무겁고 큰 삽을 '손 몽둥이'로 놀리는 방법을 익히면서 해야했다. 그는 그 스스로 손몽둥이라 말한다.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 밤 9시까지 염전에 물을 대고 새벽까지 소금을 펐다. 하루 2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지만 보람으로 일을 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인내라는 것이 그리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1996년 그 와중에 그의 머리 속에 남을 돕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손을 잃은 대신에 얻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소금 한 포대가 1만원 가량하니 여기서 1000원을 떼어 모았다. 그걸로 소금을 당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었다.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올해까지 14년째다. 한달 월급 받고선 고된 일 마다하고 도망가 버리는 직원들 대신에 부부가 직접 염전을 지으며 실천하고 있는 일이다. 아산의 한 복지단체를 통해 소록도에 김장용 소금을 30포대씩 보내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강경환 그는 말했다.
"조금만 마음을 가지면 되는 겁니다. 소금 한 포대 팔아서 1000원 떼면 5000포대면 500만원이잖아요. 하나를 주면 그게 두 개가 되어 돌아오고 그 두개를 나누면 그게 네 개가 되어서 또 나눠져요. 연결과 연결, 그게 사는 원리지요."
그 나눔과 연결의 원리에 충실한 결과 2001년 그는 기초생활수급자 꼬리표를 뗏다. 작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시청으로 가서 자발적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포기했다. 수급자 수당 30만원을 버렸다. 장애인 수당도 포기했다.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주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어렵다. 염전도 남의 염전을 소작하고 있고, 여고생인 둘째딸 학비도 버겁다. 손을 내밀라고,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을 내밀라고. 작년에는 '밀알'이라는 자선단체를 만들었다. 혼자서 하기에는 버거운 일. 그래서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불우한 사람들을 더 도우려고 그랬다.
"한 30억원 정도 모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마음놓고 남 도울 수 있잖아요. 지금은 형편이 이래서 돕고 싶어도 어렵고.. 오늘도 부부가 소금밭에 나가서 소금을 거두는데 손 없는 남편이 능숙하고 진지한 몸짓으로 소금을 모으면 아내는 얌전하게 삽으로 밀대에 소금을 담고 남편이 그 밀대를 '손몽둥이'로 밀어 소금창고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 모습, 장엄이란 단어로 표현하기 부족한 소금장수의 뒷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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