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인터넷을 떠돌던 중 위와 같은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리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터넷 상이지만 시대의 영웅, 이순신 장군님이 새겨진 백원을 저런식으로 합성하고 웃음거리로 삼아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이 왜 백원에 새겨졌는지 알면 저런 장난은 절대 못칠거라고 생각합니다. 백원에 새겨졌다고 오백원에 새겨진 학보다 못한다는 소리가 있는데 이 소리를 한 사람이 학보다 못한거 같습니다.

백원에 새겨진 충무공의 비하인드 스토리

물가상승으로 백원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그곳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님의 가치도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미국공화국이 세워졌을때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측근들은 워싱턴의 초상을 백달러지폐에 그려넣자고 제안했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은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초상을 일달러지폐에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이유인 즉슨 백달러지폐는 적은 수의 부자들만 볼 수 있지만 일달러지폐는 가난한 사람까지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이순신장군이 백원에 새겨진 이유는 그의 업적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이를 새기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중국과 일본에서 본 성웅 이순신의 장군님의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990년부터 1998년 약 8년에 걸쳐서 중국학자 5명과 일본학자 7명 그 외 일본사관학교 장교 및 중국인민박물관장, 한국해군사관학교장교들의 도움으로 총 32권이 발권되었습니다. 이 책은 크게 이순신장군의 생애를 다룬 5권. 일본장수가 본 이순신장군 2권. 명나라가 본 이순신 1권. 1500~1600년대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 10권. 이순신과 임진왜란 5권. 도요토미와 이순시 2권.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 내용이 25권, 그리고 역사적 근거로 가설을 부친 내용 7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특이한 점은 일본장수가 본 이순신장군이 2권이나 된다는 점입니다. 이순신장군께서 난중일기를 남겼듯이 일본장수들도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와키자카와 도도, 이 두사람은 이순신장군님에 대한 기록이 유별나다고 합니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 그랬을 것입니다.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KBS1 역사스페셜에 나온적이 있습니다.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장군님 탄생 때 온다는 점. 와키자카가 이순신장군님을 알게된 것은 한산도대첩때입니다.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중시 하였으며 차를 좋아했고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신의 수하로 만드는 타입이였다고 합니다. 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 정도 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 중의 명장입니다.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도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문 :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날 몇일 먹을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와키자카는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습니다. 그 중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도 이순싱니며 가장 차를 함께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적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입니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님의 탄생 때 오시는가 봅니다.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운덕'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후일 이순신장군님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루는 어두운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 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 바람속을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는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거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 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 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보면 누가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조선장수 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 영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았다.
(황제 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르지닌 바 만일 조선 수군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 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훗날 청)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 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 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께 충을 다할 것이옵니다. )




이 외에도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학자나 장군들이 남긴 기록은 많습니다. 여수에서 열린 거북선 축제에도 참가해 보았습니다. 위엄은 대단하지만 무언가 충무공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담기에는 부족해보였습니다. 수학도 좋고 국어도 좋고 영어도 좋지만 적어도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를 먼저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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